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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노트/글
2008/07/23 02:42
외출을 하려고 카메라 보관용 가방 깊숙히 내버려뒀던 낡은 카메라를 꺼냈다. 필름카운터가 고장나버려 항상 자기 마음대로 남은 필름 컷수를 '어리버리' 하게 알려주었기에 '버리'라고 이름붙인 나의 오래된 카메라.
"넌 가끔 필요할때만 나를 찾는구나." 버리가 볼멘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미안. 그동안 일이 좀 많았어. 너도 알잖아." 버리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내 얼굴을 외면했다. 토라진게 분명해 보인다.
여러분은 믿기 어렵겠지만, 사실 녀석은 '여자'다.
어느 햇살이 눈부시던날, 단골 카메라 샵에서 처음 그녀를 만났을때, 그녀는 자기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넌 정말 운이 좋은거야. 난 백만대에 한대꼴로 밖에 없는 여자 카메라야. 보통 카메라들은 대부분 남자로 태어나거든. 그러니까 나를 통해 세상을 보게된걸 기쁘게 생각해야 할꺼야. 후훗" ".............................' " 어? 그 눈초리는 뭐야? 못 믿겠다는거야? 진짜야. 진짜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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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화가 단단히 났으니 지금 필름을 물리는것은 아무래도 무리라고 판단했다. 나는 가벼운 한숨과 함께 조용히 그녀을 내 어깨로 데려왔다. 필름은 나중에 그녀의 화가 풀어지면 물려야지라는 생각과 함께.
처음에는 그냥 시내로 나가 그녀와 영화나 한편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하철 안, 맞은편에 앉아있던 대머리 아저씨가 보던 신문 일면 광고속의 파란 바다가 내 시야에 들어오자 이내 마음을 바꿔먹었다. '그래, 바다로 가야겠다.' 지갑속에 지폐가 넉넉하지 못한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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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을 반시간 정도 타고 기차역에 도착했다. 돈이 별로 없으니 열차표는 가장 싼걸로 끊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필름 안 넣어줄꺼야?" 아무말도 안하고는 견디기 힘들었는지 버리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나는 이내 싱긋웃으며 내가 좋아하는 필름인 Tri-X의 팩키지를 뜯기 시작했다. 그녀가 다급히 말했다. "아니 잠깐. 오늘은 컬러가 좋을것 같아." "안돼. 지금 가진 필름은 이것밖에 없단 말이야." "싫어 그래도 컬러가 좋단 말이야." "억지 좀 부리지마! 없는걸 어쩌라고?" "...................."
이런, 또 토라질 기세다. 나는 별 수 없이 열차역 구석진 곳에 자리잡은 매점에서 평소사던 가격의 배를 지불하고 싸구려 컬러 필름을 사올 수 밖에 없었다.
지갑이 더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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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몇번 없는 싸구려 통근 열차표를 끊었더니 본의 아니게 대합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무한정 늘어났다. 나는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가슴팍에서 담배 한개피를 꺼내 물었다.
"지금 뭐하는 거야?" 버리가 조리개를 한껏 조이며 매섭게 노려본다. 나는 아무말 없이 일회용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빨리 불꺼!! " "알았어.. 조금만 피고." "끄라니까~!!" "......."
결국 담배는 불도 붙여보지 못하고 다시 나의 가슴팍 안으로 돌아갔다. 항상 이런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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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안은 한산했다. 덕분에 편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차창밖의 풍경이 조금씩 빠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스며드는 5월의 햇살은 따뜻하다. 갑자기 마음이 편해졌다.
"이렇게 같이 움직이는게 얼마만인줄 알어?" 버리가 들뜬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글세.. 두어달 쯤 되지 않았나?" "치..바보..!! 지난 겨울에 일출을 보러가고는 처음 이라고. 알어? 거의 반년만이라고!!" "아.. 그래?" ".........."
내가 심드렁하게 대답하자 또 기분이 상한 모양이다. 그녀는 이내 말없이 시선을 다른곳으로 돌리고 만다.
"으이그.. 까다롭기는...이리와봐." 나는 양손으로 버리를 덥썩 잡고는 뷰파인더 안으로 나의 눈을 가져다 댄다. 눈을 가까이 가져다 대고 그녀를 통해 파인더 속 세상을 바라보는 일은 어떤의미에서는 연인들끼리의 키스와도 비슷하다. 그녀의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촛점을 잡고 조리개를 만지작 거리면서 세상을 보는 일은 황홀하다. 내가 셔터로 손을 가져가자 버리가 입을 삐죽 내민채 말을한다. "쳇. 누가 맘대로 찍게 해준데?" 나는 싱긋 웃으면서 오른곤 검지로 살포시 셔터를 눌렀다. 셔터가 부드럽게 눌러지면서 경쾌한 소리를 낸다. "찰카닥"
".....이번 한번만 봐준거야."
그녀가 어쩔 수 없다는듯 말했다. 나는 웃으며 리와인딩 레버로 손을가져갔다. 이제 남은 컷수는 3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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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졸았다 싶더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한 모양이다. 버리가 내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며 나를 깨웠다.
"형편없는 찍새씨 일어나세요!!!" "누가 형편없다는 거야?" "여기 당신말고 누가 있어? 히히.." "필름 숫자도 못세는 주제에......헛....." ".............."
.....아차 싶었다. 이 카메라는 어쩌면 이렇게도 다루기 힘든것일까. 나에게 버리를 권한 카메라 샵 주인이 원망스러워졌다. 예전에 나와 같이 다니던 카메라는 이렇게 다루기 힘들지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말없이 조용히 맡은 일만 하는게 불만스러울 정도였으니.
오래전 내곁에 있던 카메라도 버리와 같이 XX염색체를 가진 카메라였다. 예전부터 생각했었지만 카메라가 여자로 태어날 확률이 백만분의 일이라던 버리의 말은 아무래도 사실이 아닌것같다. 사실 그게 중요한것은 아니지만.
'이름이.. 뭐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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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무리를 해서 택시를 타고 바닷가에 도착했다. 요금을 지불하고 다니 지갑은 더욱 가벼워졌다.
출발할때만 해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날씨가 좋았는데, 막상 도착해보니 비라도 내릴듯 하늘이 울상이다. 시커먼 하늘을 보고 있자니 절로 한숨이 나온다. 기왕이렇게 된거 사진이나 많이 찍어가야지. 흐린 바다는 오히려 좋은 모티브가 될 수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한채 '꺼리'가 될만한 피사체를 찾아 고개를 돌려본다.
나보다 먼저와서 사진에 몰두하고 있는 중년의 사나이가 눈에 들어왔다. 연약한 카메라에 육중한 렌즈를 마운트 한것이 위태위태해 보인다. 갑자기 사내가 쓰는 카메라가 어떤것인지 궁금해졌다. 쓸데없는 호기심인것은 알지만 이미 버릇이 되버린후라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그 남자 곁으로 다가갔다.
신고있는 스니커즈안으로 모래가 자꾸 들어온다. '샌들을 준비해오는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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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오랜만이네."
의외로 나에게 먼저 말을건것은 그 사내의 카메라였다. 처음엔 조금 놀랐지만 곧 예전에 나와 함께하던 오래전 그녀란것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버리를 미리 가방속에 두고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은 질투가 많으니까.
"아..그래..그 동안 잘 지냈어?" "나야 항상 똑같지. 언제나 그랬듯이 내가 할일을 하고 있을뿐이야." "새 주인은 마음에드니?" "마음에 들고 안들고가 어디있어. ....그런데 솔직히 네가 조금은 좋았다고 생각해." "어? 웬일이야 네가 칭찬을 다하고?" "지금 주인은 나랑 이야기 하는법을 모르거든. 단지 그 뿐이야."
그녀의 이야기에선 웬지 쓸쓸함이 묻어난다.
"그래도 난 내 할일을 해야해. 예전부터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꺼야." "지금 내와 같이 다니는 녀석은 자기가 하기 싫으면 하지않는걸." "... 그건 아마 그애가 너와 닮았기 때문일꺼야." "그게 무슨 소리야?" "난 예전부터 네말을 잘따랐어. 내가 셔터를 누를때면 항상 열심히 내 역활을 했지. 하지만 나도 마음이 내키지 않는 사진을 담아야만 할때가 있어. 그애는 그게 싫은걸꺼야. 아마도.." "...그래도 자기 역활에 무책임하다는 비난을 피해갈 수 는 없다구." "역활은 누가 정한거야? 너도 마음에 내키지 않으면 셔터를 누르지 않잖아? 결국은 마찬가지라고."
할말이 없어진 나는 머슥하게 웃으며 말한다. "....그렇게 말이 없더니 못보던 사이에 말이 참 많아졌네. "
그녀를 데리고 있던 중년의 사내가 볼일을 다 마쳤는지 어디론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가야할 시간인듯해. 반가웠어." "응...나도.." "그리고... " "......?" "..아니야. 가볼께... 잘지내."
사내의 뒤뚱거리는 걸음과 함께 그녀도 점점 멀어져갔다.
그녀는 무슨말을 하고 싶었던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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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내가 있던자리로 돌아가 가방속에 버리를 꺼냈다. 그녀가 가방속에서 뛰쳐나오면 소리쳤다.
"휴~ 답답해서 죽을뻔했자나!! 어딜 갔다온거야? 그리고 너 말이야. 아무렇게나 가방을 두고 다니면 어떻게해? 누가 훔쳐가면 어떻하려구!! 정말.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르겠다니까." "히히.. 미안해." "어? 너 왜웃어? 정신 나간 사람처럼! 그만웃어... 정들겠다?! " "아니야~ 해 떨어지겠다. 빨리 사진이나 찍자."
버리를 목에 걸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느새 구름이 걷히고 내 눈앞에는 눈부신 바다가 반짝이고 있었다. 너무 눈이 부셔 똑바로 대할 수 없을 만큼.
이제, 집으로 돌아가면 버리의 필름카운터를 고쳐주리라 마음먹는다. Copyrights ⓒmindviewer.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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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글 잘읽고갑니다.